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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공부

국가형성과 문화발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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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하여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동삼성 일대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구리로 만든 청동기가 보급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신석기 시대보다 생산 경제가 발전하며 전문적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사유 재산과 상하의 계급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요령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한반도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함북 회령 오동리 나진 초도 평북 강계 공귀리 의주 미송리 평남 승모군 금탄리 경기도 여주 흔암리 파주 덕은리 충남 부여 송국리 충북 제천 양평리 등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주목할 유물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되끼를 포함하는 석기와 비파형 도검 거친무늬 거울 화살촉 등의 청동제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와 전형적인 민무늬 토기 등이 있는데 고인돌 돌무지무덤 돌널무덤 등에서 골고루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미송리식 토기는 의주의 미송리 동굴에서 처음 발굴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밑바닥이 납작항 항아리 양쪽 옆에 있는 손잡이가 하나씩 달리고 목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고 표면에 집선 무늬가 있는 것이 대체적인 특징입니다 분포지역은 주로 청천강 이북 길림 요령 일대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청동기 시대에 이 지역이 같은 문화 공동체 권역에 속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는 지역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빝바닥이 좁은 팽이형과 판판한 원통 모양의 화분형이 기본적이며 빛깔은 적갈색인 것이 독특하게 되어있습니다.
 
 

철기시대 

청동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지혜를 계발하고 점차 생활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기원전 4세기 경부터는 철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국 화폐인 명도전 등도 유통되어 활발하게 교역활동을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닌 한자도 사용되었습니다 최근에 발견된 경남 의창 다호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철기 유물과 함께 붓이 발견되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서도 한자가 보현적으로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충남 예산군 능서리에서 출토된 대쪽 모양의 동기나 충북 청주 비하동에서 나온 세형 동검 민무늬 토기와 긴 목향이라도 이 시기의 다양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특징이 한국식 동검이라 불리는 세형 동검이며 거친 무늬 거울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잔무늬 거울로 형태가 서서히 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토기도 여러 가지 모양이었습니다 민무틔 토기 이외에 검은 간토기 입술 단면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덧띠가 붙여진 덧띠토기 붉은 간토기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 문화도 더욱 활짝 펼쳐졌습니다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우리만의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 사례가 많습니다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거푸집도 전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남 영암 구림리에서 출토된 거푸집이 손꼽히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건국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부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습니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부족장은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온 국민이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는 단군 왕검은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고조선은 초대 단군 왕검이 건국했다고 합니다 건국신화는 천지가 개벽한 후 음양이 생기고 그 속에서 사람과 삼라만상이 발생하며 하늘로부터 사람들을 통치할 사람이 내려와 국가를 건설하고 다스린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단군은 제정 일치의 지배자로서 고조선의 성장과 함께 주변의 부족을 아우르고 그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킨 인물인 것입니다 단군 숭배사상은 고려 시대 이르러 민족 공동의 시조로 구체화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실존설로 대중화되어 세종ㅇㄴ 평양에 사당을 지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과 단군을 함께 모시고 국조로 받들었습니다 또한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가 강동에는 단군의 묘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후 조선 말기부터 단군교 대종교가 생겨 단군이 종교적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대종교에서 시행된 10월 3일의 개천절은 임시정부에서 처음 거행하였고 8.15광복후 국경일로 제정하여 단군의 개국과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건국이념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단군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 앞의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는 단군의 조선 건국 기록에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들어 있어 고려 조선 근 현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기자 동래설 문제 

기자 동래설은 중국 한서지리지 등에 있는 설로서 기원전 12세기 경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뒤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단군 조선의 뒤를 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족이 한사군을 지배할 당시 그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위만에게 멸망당한 준왕의 성이 한씨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기자가 아닌 한씨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기자를 참칭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경해도 있습니다 또한 기자 조선을 고조선의 발전과정에서 사회 내부에 등장한 어떤 강한 지배세력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동이족의 이동과정에서 기자로 지칭되는 어떤 부족이 고저선의 변방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설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게 밟혀지지 않았습니다 
 
 

한인의 침입과 위만조선 

우리나라 남족 지역에서는 삼한족이 평화롭게 살았고 북쪽과 동삼성의 일부에서는 예맥족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먼저 발달한 한족이 세운 연 나라가 진의 세력에 눌려 동삼성 지방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21년에 진희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중국인은 동삼성 지방에 더욱 압력을 가했으며 그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도 세력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진나라가 10여 년 만에 망하고 한 나라가 뒤를 이어 세력을 떨쳤습니다 이때 연나라가 한나라에 통합되자 연왕 노관은 흉노족에게 망명하고 그의 부장으로 있던 위만이 천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고조선에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북방수비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수한 철기문화와 유량민의 세력을 규합하여 준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위만은 입국할 떄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아마 연나라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아닌가 합니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조선 이라 했습니다 당시 토착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이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위만은 예전 준왕의 땅을 저눕 차지하고 다시 영토를 확장하여 진번 임둔 등의 부족 국가를 예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진국등 한강 이남 나라들이 한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차단하여 중간 이익을 독점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사방을 정벌하고 중국의 천자로서 위세를 떨치던 중 원봉 2년에 한무제의 사신 섭하가 위세를 뿜내면서 당시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을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위만 조선이 중국에서 조공을 바치라는 수작이었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도 우거왕은 한나라 사신을 괄시할 수 없어 접대관으로 하여금 압록강까지 배웅하라 하였습니다 섭하는 압록강 근처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접대관을 몰래 암살하고 한무제에게 조선의 대장을 죽였노라고 과장해서 상주하였습니다 내막을 모르는 무제는 만족함을 표하고 섭하의 벼슬을 높여 요동동 부도위로 삼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거왕은 섭하의 괘씸한 행동을 그대로 둘수가 없었습니다 즉시 대군을 동원시켜 압록강을 건너 헙하의 목을 잘랐습니다 이로써 위만 조선과 한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에게 7천 명의 군사를 주어 평양성 공격을 명하였습니다 양복은 우거왕을 너무 얕잡아보고 대동강 하류 지애에서 무리한 적전상륙을 사다가 여지 없이 패하여 7천의 군사는 거의 섬멸되고 자신만 겨우 목숨을 건져 산증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한무제는 최장군 순체를 보내 육로로 패수 서쪽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패했습니다 한무제의 높은 콧대가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한무제는 작전을 바꾸어 이번에는 사신 위산을 보내 무력으로 위엄을 보이며 화의를 맺도록 하였습니다 우거왕도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려 이에 동조하고 태자와 말을 보내 사례하도록 하였습니다 태자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례길에 나서 패수를 건너려 할 떄 사신 위산과 좌장군 순체가 태자에게 호위군사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하자 신변을 걱정한 태자는 강을 건너지 않고 왕검성으로 되돌아갔고 화의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평화협상은 시간을 벌기 위한 한나라의 계책이였습니다 한나라의 수만 군사는 물밀듯 공격해 왔고 평양성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조선 군사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여졌습니다 좌장군 순체는 서북쪽을 공격하고 산으로 도망쳤던 누선장군 양복은 이때야 나타나 남쪽을 공략했습니다 평양성은 그래도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먼저 도망쳤던 양복이 평화협상을 제의하며 타결책을 모색하자 화의를 주장하던 우거왕 대신 노인 한도 이계상 참 장군 왕겹 등이 은밀히 화의 교섭을 벌였습니다 한편 한무제는 싸움이 장기화되자 다시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 결전을 감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공손수는 순체의 말만 듣고 양복을 잡아 가두니 한무제의 원정군은 두 갈래로 갈라져 전력이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우거왕은 최후의 결전을 감행하려 하였으나 전에 양복과 은밀히 화의 교섭을 벌이던 한도 등이 한군에 투항하다가 노인은 중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계속되어 해를 넘겼습니다 1년 동안 계속된 싸움에 사람들은 지쳐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래도 우거왕은 최후까지 결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군에게 투항했던 이계상 참이 사람을 몰래 보내 우거왕을 암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대신 성기가 왕검성을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자 순체는 먼저 투항한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로 하여금 성내의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기를 죽이니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위만조선은 3대 80여 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한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위씨 조선의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의 3군을 설치하고 기원전 107년에 예백지방까지 합쳐 현도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4군을 설치한 후 20녀 년 후에는 진번 임두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은 낙랑군에 임둔군은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켰습니다 이들 한시군의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는데 한문화가 이곳을 중심지로 옮겨오고 주변 사회에 퍼져 한국 전 지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낙랑군에서 발견된 각중 문화유산으로는 동기 옥기 철기 와전 직물류가 있어 당시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조선은 팔조금법에 의거하여 개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노동력을 사유 재산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고조선 사회의 기본 법률로서 8조만 한서지리지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서지리지에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생명과 사유재산을 중히 여겼음을 알수 있습니다 또 당시 사회에는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성립되었고 형벌 노비도 생겨났습니다 여성이 정절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한사군이 설치된후 한인들의 수탈 정치가 시작되면서 한인에 대한 저항 운동의 결과 민족적 자각 의식이 생기고 우수한 철기 문화가 도입됨으로써 부족 국가가 여러 개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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