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가 재 3차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 승리하면서 세력이 커감에 따라 노예의 숫자도 현저히 늘어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노예들을 도구처럼 생각하고 부려먹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죠.. 이렇게 되자 노예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자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칠리아 섬의 반란과 노예 검객인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들수 있습니다 시칠리아 섬의 반란은 에우누스라는 시리아인 노예가 일으킨 반란으로 그는 입에서 불을 뿜어 내는 요술을 부리고 예언을 하는 신통력 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지도자 에우누스는 기원전 135년 자신이 시리아의 여신에게서 앞으로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주이으로 부터 심한 학대를 받는 노예들을 모아 엔나라는 도시를 습격하여 빼앗았습니다 그 후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의 의해 왕이 된 에우느스는 시리아 왕국을 세운 셀레우코스의 자손인 안티오코스 왕이라 칭하며 그는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시리아인처럼 다루 었습니다 한편 노예들의 반란 소식이 시칠리아 섬으로 퍼지게 되어 섬의 서남쪽에서도 시리아인 노얘 클레온이 이끄는 새로운 노예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클레온은 반란을 일으킨 뒤에 노예들을 이끌고 에우누스를 왕으로 모시고 그의 부하로 들어감으로써 시칠리아 섬의 노얘 반란은 같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로마는 노예들의 반란을 아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노예들은 조직적이고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엔나에서 사로잡은 시민들을 무조건 죽이지 않고 기술자들은 골라내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력을 키워 나갔던 것입니다 로마는 이 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적의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패하여 도리어 노예들의 사기만 더 올려주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로마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집정관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반란군의 본거지인 타우로메니움과 엔나를 공격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클레온은 전사하고 에우누스는 사로잡혀서 많은 노예들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이 무렵 시칠리아 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는 노예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아테네의 라우레이온 은광과 노예 시장으로 유명한 델로스 섬까지 반란에 휩쌓였으나 곧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아시아 페르가몬 왕국에서도 노예와 빈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태양국을 세웠다가 3년만에 진압되었습니다
노예 반란과 함께 로마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걱정거리로 나타난 것은 군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본디 로마의 군대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본디 로마의 군대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시민들로 이루어졌는데 귀족들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농민들의 수가 늘어가자 군사로 뽑을 수 있는 청년들의 수가 차차 줄어들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이것을 막으려 군사를 뽑는 자격을 낮추어 군대의 질이 떨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로마는 그 동안 숱하게 많은 군사들을 희생시키면서 차지했던 영토와 노예 정복지의 주민들을 마음대로 다스릴수 없을 뿐 아닌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자들이 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군사력을 튼튼하게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됨으로써 토지를 개혁하는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로마에는 많은 귀족들이 새로 나타나 대부분의 공유지를 멋대로 차지하며 많은 노예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토지 개혁을 주장하고 나서자 귀족들의 반대가 난리를 친 것입니다 그라쿠스는 새로운 귀족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집안이었습니다 기원전 137년에 재무관에 되어 에스파냐의 누만티아 전투 지역으로 가던 길에 에트루리아를 지나면서 농민들은 보이지 않고 노예들만이 밭을 일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누만티아에 이르러서도 로마군이 쩔쩔매며 싸우고 있음을 보고 그는 로마군의 질이 매우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일어난 시칠리아 섬의 노예 반란은 그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중대한 결심을 한 그라쿠스는 기원전 134년말에 호민관을 입후보 하여 당선되었으며 이듬해에 곧바로 토지 개혁 법안을 민회에 내놓았습니다 이 법안은 공유지를 차지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하고 그것을 벗어난 토지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이처럼 중대한 법안이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민회에 바로 들어간데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마침내 원로원은 그라쿠스의 동료인 호민관 중의 한 사람인 옥타비아누스를 끌어들여 거부권을 내놓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라쿠스도 지지 않고 평민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옥타비아누스 해임안을 민회에 내놓았으며 이 제안은 대다수의 찬성으로 옥타비아누스를 해임했고 토지 개혁 법안도 통과 되었습니다 한편 원로원은 호민관을 해임시킨 그라쿠스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토지를 받아도 농사를 지을 돈이 없었기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침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에 바쳤으므로 그라쿠스는 이 왕국의 돈을 농민들에게 농사 자금으로 나누어 주는 법안을 민회에 내놓아 통콰시켰습니다 본디 이러한 외교에 관한 문제는 원로원에서 다루게 되어 있으나 민회를 손에 넣고 있는 그라쿠스가 이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라쿠스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들고 일어날 낌새를 보이자 그라쿠스도 여기에 맞서기 위해 한 번 밖에 지낼 수 없는 호민관의 선출 방식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 출마했습니다 그러자 그라쿠스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킬 낌새를 보이자 그라쿠스도 여기에 맞서기 위해 호민관의 선출 방식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 출마했습니다 이에게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이 그라쿠스를 비롯하여 그의 일파 백여명을 무참히 죽여 티베르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가 살해된 뒤에도 3인의 특별 위원회는 새로운 위인들로 채워져서 그 임무가 계속되나 다시한번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즉 이탈리아 안에서 동맹을 맺은 도시의 부자들은 규정의 범위를 벗어나는 많은 공유자를 빼앗기는 반면 동맹 도시의 가난한 농민들은 로마의 시민권이 없었기에 토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족과 부자들은 욕심껏 토지를 늘려 나갔기 떄문에 로마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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