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공부

이집트 문명을 공부해보자

티원쓰 2023. 6. 8.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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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왕국 시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인의 문명이 나타날 무렵 이집트에서도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농경이 이루어 졌는데 나일 강의 물과 강변을 따라 널려 있는 기름진 땅이 뒷밤침 되었습니다 나일강은 해마다 홍수로 강물이 넘쳐 강변에 기름진 땅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메마른 사막 시대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몰려들어 부락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메소포타미아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차이가 커서 나일강은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보다는 훨씬 더 이용할 곳이 많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홍수 때마다 강물이 넘쳐 강둑 위에 있던 모든 것을 진흙 속에 묻어 버리기는 하지만 강물의 넘침은 규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미리 알수 있었습니다 또한 강물의 넘침은 메소포타미아의 삼각주와는 달리 규칙적 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맞출수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 고대 이집트에는 히에로 글리프라는 상형 문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알아보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상형문자는 주로 기념비나 묘비 등에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찍이 이집트는 상하 두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뒤 상왕국에서 메네스왕이 하왕국을 점령하고 나일강 하류의 멤피스까지 약 1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는 단일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왕국은 2천년동안 계속 되었으며 그 시대의 어떤 수메르 도시국가들보다도 훨씬 크고 강했습니다 이집트는 한 지배자 한 종교 그리고 한가디 정부 형태 아래에서 외부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존속하였습니다 물론 이집트도 역사의 흥망 성쇠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강대해졌으며 때로는 쇠약하고 가난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기원전 2700년에서 2200년에 걸친 고왕국 시대와 2010년부터 1600년경 힉소싀의 침입으로 멸망한 중왕국 시대 그리고 1580년에 힉소스를 물리치고 일어섰다가 기원전 11세기에 다시 외침으로 쇠퇴해진 신왕국 시대 등 셋으로 구분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왕국 시대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반이 마련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이집트인의 대규모 건축을 들수가 있으며 이 시대에 세워진 피라미드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왕을 위한 거대한 무덤 이었습니다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규모도 크거니와 원시적인 도구들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제 지방에 있는 가장 큰 피라미드는 높이가 무려 6백만 톤에 이르렀으며 각 변의 길이 또한 250미터나 되었는데도 그 오차는 20센티 미터도 안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 무렵의 기하학과 건축 수준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집트 인들이야 말로 피라미드는 자신들이 신처럼 숭배하는 왕이 세상을 떠나 뒤에 편하게 지내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볼때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 왕은 기껏해야 땅 위에서 신의 대리 구실을 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의 왕은 곧 우주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 현상을 신화를 통해 설명 했습니다 파라오라고 불리는 왕은 태양신 레의 아들이었습니다 파라오란 궁전 또는 큰 집이라는 뜻으로 파라오가 죽으면 저승의 왕이자 어학 결혼 곡물의 여신인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스와 한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저승에서 신으로 되살아나 나일강의 강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조절하며 곡실이 알차게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왕을 신으로 믿는 것은 파라오 만이 거대한 관개 사업을 추진하여 나일강의 강물을 조절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왕국의 왕들은 사제들보다 더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신처럼 받들였던 것입니다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는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외에도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나 대부분이 무덤이나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 였습니다 왕이나 부자들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고 그들의 가족은 이집트인의 일상 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무덤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돌은 구하기가 수메르인보다는 쉬웠으나 값이 비쌌기 때문에 흙벽돌 이나 갈대로 오두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피라미드 다음으로 잘 알려진 것은 미라 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은 죽으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라를 만들거나 무덤을 정성스럽게 꾸몄습니다 이때 시체가 썩는 것을 막기위해 골과 내장을 뽑아내고 약품을 넣은 뒤에 방부제를 다져 넣는 등 매우 복잡한 작업이 필요 했습니다 이들 미라 중에는 얼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도 있어서 수천 년 전의 인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종교

이집트는 다신교 국가이므로 신들의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갖가지 신화가 모여서 전체적으로 우주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하나하나의 자연현상마다 각각 다른 신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가장 큰 신은 아몬 레 인데 태양신으로 창조된 아톰의 권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몬 레 밑에는 대기의 신 슈 습기의 신 테프누트가 있는데 이들은 아톰의 자식들 이었습니다 이들 신들은 서로 결합하여 세트. 네프티스. 오시리스. 이시스를 낳았습니다 이어서 오리시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하여 오리시스는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오리시스의 아들 호루스와 세트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자 오리시스의 아우인 세트가 형을 시기한 나머지 계략으로 그를죽여 시체를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리시스의 아내 아시스는 남편의 시체를 자신의 날개로 부쳐 다시 살아나도록 했으며 오리시스는 저승에서 죽은자의 죄를 심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오리시스의 아들 호루스는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와 싸워서 이겨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신들의 법정에 섰습니다 신들은 호루스의 정통성을 인정 했으며 호루스는 아버지인 오리시스에 이어 지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화에서 알수 있듯이 파라오는 불행하게 죽을수도 있으나 그것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오리시스 처럼 저승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미라로 된 시체와 함께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무덤속에 던져 졌습니다 고왕국 초기에는 시종들까지도 죽은 왕과 함께 산채로 매장 되었으나 차차 산 사람 대신에 조각상 들을 넣게 되었습니다 고왕국 시대에는 죽은 파라오만 오리시스와 결합한다고 믿었으나 중왕국 시대에는 파라오와 함께 귀족들도 오리시스와 결합할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뿐만 아닌 신의 뜻에 따라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다가 일생을 마친 일반 사람들도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 살아나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의 몰락

고왕국과 중왕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이집트는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은 삼각주 지역을 점령한 뒤에 자기 아들인 네코로 하여금 이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네코의 아들 프사메티쿠스 1세는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집트 왕국을 다시 세우고 사이스를 서울로 정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사이스 왕조 라고 부릅니다 이 왕국은 기원전 569~526년 아마시스 2세때 전성기를 맞았으며 특히 그리스식 무역 도시인 나우크라티스가 번영 했습니다 그 뒤 기원전 526년에 페르시아의 왕인 캄비세스 2세가 다스리게 되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하는 한 주가 되어 결국 파라오의 제국 이집트는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