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공부

고대에 로마시대에 대하여...

티원쓰 2023. 2. 1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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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는 BC8세기 경에 중엽에서 5세기 말까지 약 13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로마 역사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첫째는 공화정치 즉 그 시대부터 황제가 다스리는 군주제도의 정치 즉 제정에 이르기까지이고 둘째는 그 디ㅜ부터 서로마 제국(395~476)의 멸망까지입니다
공화정치 시대의 로마는 차차 평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법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치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 그시대의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와 통일에서부터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데 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농민 중심의 사회가 무너지고 그에 따른 문제점들이 여기저기에서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건국의 신화
그리스군이 목마를 이용한 계략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날 밤에 성 안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있었습니다 트로이의 영웅이었던 아이테아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민과 부하들을 이끌고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탄 뒤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떄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아이네아스 일행이 탄 배들은 파도에 시달리며 허우적 거리다가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카르타고까지 밀려갔습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 말에 티루스의 이민들이 그들의 여왕을 받들어 세운 국가로 시칠리아 서쪽까지 세력을 뻗어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강해졌습니다 티루스의 여왕 디도는 베로스의 딸이며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피그말리온의 여동생 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부자였는데 피그말리온이 그의 재산을 탐내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디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죽은 남편의 재물을 몇 척의 배에 가득히 싣고는 이것으로 온 뒤에 원주민들이 애원하여 작은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디도는 쇠가죽을 길다랗게 잘라서 몇 개의 끄나풀을 만들어 땅을 친 다음 그곳에 성을 세우고 쇠가죽이란 뜻의 비루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성을 중심으로 카르타고가 생겨났으며 디도는 여왕이 되었습니다 한편 아이네아스의 일행이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가에 이르러 닻을 내렸는데 그곳은 라티누스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는 티베르 강가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로마를 다스리는 사람은 왕이었고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재판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제사장을 맡았습니다 또한 씨족의 족장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있었고 평민들은 족장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한떄 에트루리아 왕의 다스림을 받기도 했으나 기원전 6세기 말에는 귀족과 평민이 힘을 합하여 에트루리아 왕을 쫓아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초부터는 평민이 귀족으로 될 수 있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고 정치와 제사도 귀족이 독차지 했습니다 다시말해 최고의 행정고나으로서 군대에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은 귀족 중에서만 뽑혔습니다 또한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집정관 2명 중 1명이 6개월 동안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등 귀족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인 발판을 튼튼하게 다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평민들을 불만에 싸이게 하여 마침내 귀족들은 똑같이 정치적 대우를 받기 위하여 투쟁했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로마시에서 동북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무르며 그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귀족들은 모든 인구의 대부분인 평민들이 없이는 국가를 움직일수가 없기 때문에 이듬해에 평민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많이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귀족들은 빚을 갚지 못하여 외국에 노예로 팔려간 평민들을 다시 데려오고 평민들만의 모임인 평민회의와 여기에서 뽑힌 호관의 활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뒤에도 귀족들은 차차 평민의 권리를 인정해 주며 기원전 450년 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동판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12정의 청동으로 새겨졌기에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여기에는 민사 소송법 사법 형법 제사법 가족법 상속법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로마는 귀족과 평민과의 사이를 부드럽게 한 뒤에 그들의 강적인 에트루리아인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로마는 전쟁에 패한 뒤에 귀족과 평민 사이가 나빠져 혼란 속에 빠졌으나 다행히도 기원전 367년에 호미관 리카니우스와 내어놓은 법으로 인해 혼란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법은 첫째 가난한 시민의 진 빚의 이자를 없애므로 그들을 구하려고 했으며 둘째로는 부자들이 많은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귀족과 평민의 차이를 줄이려고 했으며 셋째로는 귀족으로 이루어진 2명의 집정관을 1명은 평민 중에서 뽑도록 함으로써 민주적인 정치를 꾀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고급 관리들을 민회에서 뽑았는데 이때에는 집정관이 내세운 후보자에 한하여 투표를 했기에 집정관에게 좋게 보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후보자가 될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들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지 못했으므로 재산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만 정치에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법이 실시 된 뒤에 집정관이 되어 권한을 부릴수 있는 평민은 이름있는 귀족과 손을 잡은 아주 적은 수의 상층 평민들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실력자로 나타난 사람을 신 귀족이라 불렀습니다 이 신 귀족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귀족들과 평민 출신의 부자고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몇 세기 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민회로는 평민회 병원회 귀족회 구민회 등이 있었으나 그리스와는 달리 모든 시민이 같은 권리를 갖지 못하고 신 귀족의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이렇게 귀족과 평민의 사이를 좁히며 세력을 뻗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