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공부

로마의 정치개혁...그리고 노예 검투사의 반란과 폼페이우스의 활약

티원쓰 2023. 2. 22.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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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모두 살해되었으나 원로원의 권위는 흔들리는 반면 민회는 새로운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로마는 민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책을 펼치려는 대중적인 정치가 나타났으며 반대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여 정책을 펼치려는 정치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민회에서 하는 일은 아테네의 민주정치와는 거리고 멀었으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이 실패하며 토지를 가진 농민들로 이루어진 로마 조직은 약해져 갔습니다 이때 집안에서 태어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 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던 기사들의 도움으로 기원전 107년에 집정관이 되어 유그르타 전쟁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령관이 되자 가난한 시민들 중에서 지원병을 뽑아서 엄격한 훈련을 거친 뒤에 군사들을 이끌고 유그르타 왕을 사로 잡아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이탈리아 북쪽 국경지대에 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인 킴브리족과 데우토네스족이 쳐들어와서 로마군을 계속해서 괴롭히자 불안해진 로마의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뽑았습니다 마리우스는 두번째로 집정관에 뽑혀 기원전 100년에 6번째로 집정관이 되자 자기와 함께 싸웠던 군사들을 제대 시킨후 그들에게 1백 유게라씩 토지를 나누어 주어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마리우스 이후에 조직된 군대는 국가에 충성하지 않고 자기를 뽑은 장군에게 충성하는 오직 한 사람의 군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장군은 병사들의 투표에 의하여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보통 때에는 병사들을 보살펴 주며 제대한 병사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줄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장군은 자신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서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해외에 식민지를 만든 다음에 그 토지를 나누어 주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난과 싸움이 계속되자 ... 로마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서 떨어진 코르피움에서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이탈리아로 정한 뒤에 화폐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이 반란을 진정시키고 마리우스와 술라를 비롯한 모든 장군들이 나섰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쫓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반란군은 오랫동안 로마군에 들어가있으면서 많은 싸움을 치루어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데다 숫자도 많았기 떄문입니다 결국 로마는 기원전 87년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모두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인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함으로써 반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88년 로마의 세금에 시달리던 속주들이 폰토스군을 열렬히 환영했으므로 미트리다테스 왕은 로마의 속주를 간단히 차지하였습니다 미트리다테스 왕은 그리스까지 나아가 아테네에 기반을 마련하고 그들의 해군 기지를 세우자 로마는 놀라 뒤집어졌습니다 로마에서는 술라가 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령관으로써 미트리다테스 왕을 무찌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습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승리한 뒤에 로마로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 일파를 죽이고 원로원의 권위를 되살렸으며 민회와 호민관의 권력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술라는 그 후 독재관이 되어 민주제를 없애고 공포정치를 하다가 스스로 정치에서 물러나 기원전 78년에 무서운 병에 걸려 독재자로서이 취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혼돈이 멈추지 않고 있을때 속주인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은 마리우스파의 한 사람으로서 에스파냐의 총독으로 있던 세르토리우스가 술라가 이끄는 부민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로마 정부에 대항하여 독립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원주민으로 군대를 만들고 그리스와 폰토스 왕국과 동맹을 맺어 로마군이 에스파냐를 쳐들어올때 그들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로마는 폼페이우스를 집관 대리로 삼아 세르토리우스를 치도록 하였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쉽게 반란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또 다시 애규모의 노예 반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원전 73년에 카푸아에 있던 검투사 양성소에서 78명의 노예 검투사들이 달아났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로서 이들이 베수비우스 화산으로 달아날 때에 근처의 농장과 목장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그들을 따라 일어났으므로 그 수가 무려 7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로마군은 계속 실패하며 반란군의 수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반란군들은 로마의 2개 군단을 무찌르고 남부 이탈리아를 단숨에 손에 넣었습니다 이들의 지도자인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군들에게 시민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금지 시키며 로마군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반란군은 레기움까지 내려가서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싸움을 도와 주기로 했던 그리스 해적들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로마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반란군들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로마군과 싸운끝에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부대가 전멸하였습니다 이때 반란군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며 북쪽으로 달아나던 5천여 명은 세르토리우스를 무찌르고 돌아가던 폼페이우스에게 전멸당하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끝이 났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에는 키리카에게 본거지를 둔 대단한 세력이 나타나 로마인을 괴롭혔습니다 또한 로마정부는 해적으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해적을 무찌르기 위한 새로운 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은 사령관을 임명하여 3년 동안 지중해 전지역과 내륙 75킬로미터 안에서 아무건 간섭도 받지 않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하자는 법 이었습니다 마침내 법안이 통과되며... 폼페이우스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가라앉히며 시민들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은 마땅했습니다 약 10만 명의 군사와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로 나아가서 해적들을 모두 무찔렀습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왕은 로마와 오랫동안 싸우는 바람에 건강이 몸시 좋지 않았는데 이때에 폼페이우스가 쳐들어오자 그는 해협을 거쳐 크림 반도로 달아났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 후 아르메니아와 조약을 맺고 로마의 보호국으로 만들여 시리아 왕국을 속주로 삼았습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로마의 공납으로 만드는 등 3년 동안에 많은 공적을 쌓았으며 로마의 세력을 지중해 전역과 흑해 지방에 까지 떨쳤습니다 기원전 31년 카틸리나의 반역 음모를 미리 막은 키케로의 인기가 대단할때 동방을 평정한 폼페이우스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용했던 것이라고 전해지는 망토를 걸치고 부하들을 거느린채 부모도 당당하게 시내로 들어왔으며 금은 보화를 가득 실은 수레가 뒤따랐습니다 동방에서 자신이 실시한 시책의 승인과 약 4만 명에 이르는 제대한 변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달라고 원로원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거절하여 폼페이우스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을 때 마침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에스파냐에서 돌아온 카이사르 였습니다 뜻이 맞는 두 사람은 로마에서 큰 부자였던 크리수스를 끌어들여 카이사르를 집정관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뒤 이들은 힘을 합쳐 로마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것을 다시말해 제 1회 삼두정치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