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의 이야기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기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키에사리온과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1녀의 자식들의 처리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카에사리온을 처치하여 혹시 뒷날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근심거리는 없앴으나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은 살려두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인기를 지탱하는 수단으로 카이사르의 명성을 철저히 이용했으며 카이사르가 독재정치를 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것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로마 시민들에게 독재자 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약타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로마 시민들과 원로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의 제1인자라는 특권을 주었는데 그것은 원로원 의원 명단에 맨 처음으로 이름이 적혀 있음으로 로마의 제 1시민이 되는 영광이었습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안에서 일어나는 실력자들 끼리의 권력 싸움을 없애기 위해 제 1인자의 특권을 원로원과 민회에 되돌려 주자 원로원과 시민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리하여 민심이 또 옥타비아누스에게로 기울어지자 원로원과 민회는 에스파냐 및 갈리아와 시리아 새로 차지한 이집트의 군사 지휘권을 10년 동안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는 한편 속주는 원로원과 그가 나누어 다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해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트라는 칭호가 원로원으로 부터 내려졌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그가 로마에서 어느정도로 존경받고 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영원히 누릴수 있는 지위도 주어짐으로써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로마의 제 1인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두개의 칭호와 지위는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임페라토르라는 지위는 뒷날에 황제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 권력도 교묘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잡았고 카이사르보다 더 현명했습니다 이유는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 하면서 황제가 되려 하지 않았으므로 로마 시민들도 그를 독재자 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로원과 민회의 권위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존중하면서 모든일을 합법적으로 처리 했기에 황제가 아니면서도 나라를 다스릴수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 공화정의 정치를 겪지 못한 로마의 속주에서는 옥타비아누스를 평화의 구세주 겨룩하고 존엄한 황제로 받들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황제라는 칭호를 썼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협조해 가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먼저 시민의 계급을 원로원 의원 기사 평민 등 셋으로 구분하여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노예 해방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 소란을 막으려 했슶니다 또한 어지러워진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해서 도덕과 종교를 일으켰습니다 이 무렵에 혼인법도 마련하여 남녀가 법에 따라 정식으로 혼인하여 자녀를 낳도록 권했으며 3명이상의 자녀를 둔 남자에게는 누구보다도 먼저 공직을 맡을 수 있는 특권도 주었습니다 군대조직은 정규 군단과 보조군과 근위군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근위군은 황제의 친위대로 군사는 적었으나 로마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매우 높았습니다 이 밖에도 경찰대와 소방대를 두어 범죄 예방과 재산 보호에 힘쓰는 한편 세금 제도도 고쳐 토지의 수익에 대하여 매기는 지조와 인두세 등 직접세를 속주의 주민들에게 거두며 관세와 노예 해방세 등 간접세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세금과 병사 모집을 철저히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인구 조사와 시민의 재산 평가를 실시했습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는 독재 정치의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모든 정치 권력을 사용하여 로마 국가 조직을 튼튼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복 사업에는 신중을 가하여 외국과의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전에 카이사르가 손을 댔던 게르마니아 지역을 완전히 차지할 계획을 세운후 그곳 사정을 잘 아는 바루스를 책임자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바루스는 재물에 욕심이 많아 그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지냈을 때는 "가는뱅이 바루스가 재물을 긁어모아 시리아를 가난하게 만들어 놓고 떠났다" 고 비난받을 정도 였습니다 그런 비루스였기에 그는 게르마니아에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처리 하기보다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재물을 긁어모으는데에만 정신이 팔렸으므로 분노한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의 주동자는 아르미니우스 였는데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기사 까지 되었으며 로마의 보조군으로 있을시에 전술 방법 을 익힌 적이 있습니다 로마군이 아르미니우스의 반란군을 치기 위해 게르마니에 이르자 그는 로마군을 숲속으로 끌어들여 기습하여 2만여 명이 되는 군사들을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보고를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엄청 놀랬습니다 그는 곧 반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로마 속주들의 총독의 임기를 늘려 반란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북쪽 지방의 경계선을 줄여 반란 사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것을 자기가 뜻하는 대로 이루었으나 후계자 문제만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는 클라우디우스의 집안에 시집을 가서 살다가 남편과 이혼한 뒤에 큰 아들 티베리우스와 작은 아들 드루수스를 데리고 아우구스투스와 재혼 했습니다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 사고로 죽고 재혼한 아내 율리아의 바람기가 점점 심해지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와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바람에 티베리우스는 큰 실망을 안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아우구스투스는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자기 딸의 부정한 행실이 티베리우스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참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율리아는 남편이 떠난 뒤부터 더욱더 뭇사내들에게 한눈을 팔아 마음에 드는 남자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의 그런 행동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마침내 판타테리아라는 작은 섬으로 내쫓아 버린 후 이탈리아 본토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후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후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캄파니아의 별장으로 물러나 지낸후 서기 14년 7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