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와 신석기 문화

구석기문화
과거 일본인 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는 구석기 시대의 문화가 없었다고 일부러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8.15민족의 광복이후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할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는 그 석기의 모양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될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의 대표적인 것은 옹기 굴포리 상원 검은모루 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공주 석장리 청원 두루봉 동굴 단양 수양개 유적 연천 전곡리 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단양 금굴 제천 창내 오령성 금우산 동굴 길림성 석문산촌 동굴 등지에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단양 금굴의 경우 그 연대가 약 70만 년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사람의 두개골과 함께 포유동물의 뼈나 석기류 등이 함께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자연 환경과 생활상이 밝혀 지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고루 분포된 구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동물의 뼈는 털 코끼리 큰뿔사슴 코뿔소 등의 큰 짐승으로부터 쥐 토끼 닭 등의 작은 짐승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런 동물 중에는 추운 지방에 사는 북방계와 더운 지방에 사는 남방계 동물 그리고 지금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동물들도 섞여있어서 그 당시의 자연 환경과 그 변천 상황을 짐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요? 처음에는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를 이용하여 동물을 사냥하거나 나무 열매와 뿌리를 채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후 돌을 떼어나고 다듬은 기술이 점차 발달하게 되자 예리한 날을 세운 긁게 밀개 자르개 찌르개 등의 소형 석기와 동물의 뼈나 뿔을 이용하여 골각기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은 사냥도구로 긁게 밀개 등은 조리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생활하였습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집자리에는 기둥자리 담자리 및 불 땐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규모는 약 3.4명 내지 10명 정도 살수 있는 크기 였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시대는 가족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무리 중에서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은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구석기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뿔 등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조각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3만년 전으로 보이는 공주 석장리 고분에서는 개 모양의 석상이나 고래 맷돼지 새 등을 새긴 조각과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소박하나마 구석기인들의 솜씨를 엿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각과 그림은 사냥을 주로 했던 그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로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에 대응하는 생활방법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구석기 문화에 이어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이해 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중석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최근에 경남 통영의 상노대도 조개더미와 거창 임블리 유적 등에서 중석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빙하기가 끝나고 다시 따뜻해지면서 그들은 이제 없어진 순록 대신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 시기에 주로 쓰인 석기는 간석기 였습니다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 등에 꽂아 넣어 톱이나 낫처럼 활용한 예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석기 문화
석기를 갈아 다듬어 쓴 신석기 시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알려진 바로는 대개 기원전 6천 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과거와는 달리 도리을 갈아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부러지거나 무뎌진 도구도 다시 갈아 쓸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무른 성질의 돌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서 만든 토기를 사용함으로써 음식물을 요리하거나 저장하게 되어 생활이 좀더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간석기와 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는 빗살무늬 토기가 먼저 손꼽히고 있습니다 토기보다 앞선 원시 민무늬 토기나 덧무늬 토기가 함북 웅기 굴포리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도미 등에서 출토된 바도 있습니다 빗살무늬 토기는 전국 각지에서 널리 출토 되었습니다 빗살무늬 토기가 나온 대표적인 지역은 평남 온천 궁산리 황해도 봉산 지탑리 서울 암사동 경기도 하남 미사동 부산 동삼동 강원도 양양 오산리 등이 있습니다 지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살기 편한 강가나 바닷가에 위치 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빗살무늬 토기는 도토리나 달걀 모양으로 밑이 뾰족하거나 둥급니다 크기나 용도도 다양합니다 당시에 이런 토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고 저장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농경 생활을 시작해 예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봉산 지탑리에서는 탄화된 피가 평양 남경 유적에서는 탄화된 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 이미 잡곡류가 경작되었음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돌괭이 돌삽 돌보습 등이 출토되어 다양한 농기구가 쓰였음을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어업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식량을 마련하는 데는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석기인들은 주로 창이나 활을 사냥을 했고 여러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뼈로 만든 낚시 등을 이용해 물고기를 낚았습니다 때로는 통나무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나 바다짐승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또 굴 대합 등 조개류도 채취하여 식용으로 썼습니다 농경이나 토기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수공업도 시작되었습니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었는데 의복이나 그물도 만들어 사용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농경을 시작하고 연장이 발달하면서 정착 생활의 기본이 되는 주거 생활도 개선됐습니다 발달된 형태의 움집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집자리 바닥은 원형이나 둥근 방향이었고 중앙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 했습니다 화덕이 사용됐다는 것은 그만큼 문명이 발달 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움집은 또 매우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이를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들을 보관하였습니다 대개 성인 4~5명이 살기에 적당한 크기 였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사회는 부족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을 기본 구성단위로 하였습니다 씨족은 처음에는 각각 폐쇄적인 독립사회를 이루었지만 차츰 정착해 생활이 안정되자 다른 씨족과의 족외혼을 통하여 부족을 이루었습니다 이때의 부족사회는 아직 지배 피지배의 분명한 관계가 발생하지 않은 평등사회였습니다 신석기인은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자연의 섭리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의식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해 구름 비 천둥 우박 홍수 등과 같은 자연 현상이나 산 하천 바위 등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 이었습니다 뿐만 아닌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 사상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과 영혼 또는 하늘을 연결시켜 주는 재인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으로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조개 껍데기 가면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녀 생식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을 보면 인류 창조의 역사를 음양의 조화에서 찾으려는 의식이 싹텄음을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