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들 지내셨죠 모두들 오늘도 변함없이 세계사 역사 공부를 함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쫓겨난 뒤에 아테네 제 1의 권력자가 된 사람은 키몬 이었습니다 키몬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알린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그는 동지중해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크게 쳐부수었고 델로스 동맹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키몬은 아테네와 대립하고 있던 스파르타에 대해 몹시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메세니아 지역에서 스파르타 사회의 최하층 백성으로 노예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던 최하 계층인 헬로트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위해 키몬이 지휘관이 되어 메세니아의 헬로트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이때 그 아테네의 동맹국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스파르타 시민들도 키몬 장군을 환영하기는 커녕 빨리 떠나 주기를 바랬습니다 이리하여 키몬의 인기는 크게 떨어지고 테미스토클레스처럼 이리하여 키몬의 인기는 크게 떨어지고 테미스토클레스처럼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기회를 업고 나타난 사람이 바로 페리클레스 입니다 보수파인 키몬이 스파르타를 도우러 떠났을때 페리클레스 민주파의 우두머리인 에피알테스와 손을 잡고 귀족 세력을 누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뒤 에피알테스가 암살되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정권을 잡은 페리클레스는 안전을 핑계하여 델로스 동행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 놓았고 페르시아와 정식으로 화해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페르시아는 육군이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를 차지하는 대신에 해군은 에게 해에 침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델로스 동맹은 필요 없게 되었으며 그리스의 각 도사는 아테네에 해마다 공납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는 동맹을 맺은 도시들의 여러가지 불만과 보수파들의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공납금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반대하는 도시들은 무력으로 억눌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하여 거두어들이는 풍부한 재력으로 파르테논의 신전을 세우는 등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불리는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룩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마침내 동맹시들에게도 보급되었고 그리스 각처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아테네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본디 그리스 제 1의 강국이었고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때에 맺어진 델로스 동맹으로 크게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차츰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성격이 정반대여서 서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제도를 썼고 아테네는 민주주의 제도를 썻기 떄문입니다 이 무렵 아테네의 압박을 받던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 원조를 청하자 스파르타는 이를 핑계로 아테네에 선전 포고를 한 후 군대를 이끌고 아티카 지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의 지휘에 따라 이미 마련된 성 안으로 피하였고 해군은 스파르타 함대를 공격했으나 기원전 430년 부터 나돌기 시작한 페스트가 몇 년 동안 계속되는 바람에 인구가 4분의 1로 줄었을 뿐만 아니라 페리클레스 마저 페스트에 전염되어 죽는 바람에 아테네의 정치는 차차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는 강화를 맺자는 귀족파와 전쟁을 계속하여 이기자는 민주파의 다툼까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아테네는 새로운 민주파의 지도자를 얻었는데 그는 페리클레스의 조카이며 스크라테스의 제자인 알키비아데스로 이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정권을 잡은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 동맹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시리쿠시를 공격할 것을 민회에서 승인 받았고 3년에 걸쳐 시리쿠사 원정을 했으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마침내 아테네에서 쫓겨났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돕는 이적 행위를 하였으며 스파르타는 그 기회를 타서 아테네로 식량을 공급하는 아티카 지역의 교통 요지인 데켈레아를 점령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테네의 동맹국들은 차차 떨어져 나가고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해군에게 자금을 보내기 시작했으며 궁지에 몰린 아테네는 대사면령을 내려서 알키비아데스를 비롯한 망명자들을 돌아오게 한 뒤에 스파르타와 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테네로 돌아온 알키비아데스는 몇 차례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노티움 해전에서 패하여 다시 아테네를 떠나 버렸습니다 아테네는 배와 시민을 총동원하여 아르누사이 해전을 치렀는데 이 싸움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무찔렀으나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많은 군함을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또 지휘관들도 귀국후에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큰 피해를 입은 스파르타는 강화 조약을 맺기 위해 회의를 열자고 했으나 아테네는 거절하는 가운데 무너지기 직전까지 다다랐습니다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 해구능 깨뜨렸고 이어서 아테네를 에워싸고 있던 스파르타의 육군은 마침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이리하여 27년이나 계속 되었던 지루한 전쟁은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습니다 아테네는 전쟁이 남긴 파괴라는 결과만 안았고 델로스 동맹은 고작 12척의 함대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에 의해서 세워진 30인 참주정이라는 과두 정부는 그들의 정적들을 대향으로 살육했습니다 과두 정부의 지도자는 크리티아스로 소카라테스의 제자였습니다 그 뒤 기원전 402년부터 아테네는 트라시불루스의 지도 아래 민주정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이미 제국으로서의 경제적인 기반을 잃어 옛날 처럼 활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뒤에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 번져가는 민주정치를 없애 버리기 위해 귀족정치를 펴나갔는데 이떄 페르시아에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켜 페르시아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의 압박에 시달리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뇌물로 유혹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맺도록 하였으며 이 동맹에 따라 스파르타에 대항했습니다 이에 스파르타는 기원전 387년에 안달기다스의 평화 조약에 따라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들을 페르시아에 넘기기로 하고 코린토스 동맹국과의 사이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편 테베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해 귀족정치를 펴다가 아테네의 원조를 얻어 스파르타의 군대를 내쫓고 민주정치를 되찾은 뒤에 보이오티아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뒤 기원전 371년에 테베군을 거느린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의 대군을 레우크트라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리스의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테베는 그리스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고 전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제까지 그리스의 진법은 가장 강한 부대를 오른쪽에 두고 적의 왼쪽을 공격하여 승리를 노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가끔 빗나가서 승패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선진을 만들어 적의 왼쪽을 타파하는 전술을 새로 개발했습니다 에파미논다스가 거느린 테베군은 이러한 전술로 스파르타의 육군을 물릴칠 수 있었고 기병을 훈련시켜 보병과 공동 보조를 취하여 기동력을 강화시켰습니다 테베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세 쳐들어가서 스파르타 군대와 만티네이아에서 싸운 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싸움에서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는 다시 중심을 잃은 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루 싸우기만 했는데 이때에 그리스인들이 오랑캐라고 업신 여기던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 까지 하겠습니다 이만 자야겠네요 다음시간에 또 봐요 또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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