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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공부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 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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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세계사 공부를 함께할 준비되셨나요? 역사공부는 알면 알수록 참 재미 있습니다
바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와 그 주변의 농촌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국가를 도시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도시국가의 시민들 중에는 많은 수의 농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도시국가 중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세력이 가장 강했습니다 실제로 도시국가의 시민들 중에는 많은 수의 농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도시국가 중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세력이 가장 강했습니다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이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침입하여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운 국가입니다 국민은 정복자의 후손인 시민과 정복당해서 노예가 되어 버린 헬로트 그리고 페리오이코이라는 반 자유인의 세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시민만이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할수 있었으며 나머지 두 계급은 시민들의 의식주 해결을 돕는 일에만 나서야 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귀족 정치를 하였는데 형식적으로 내세운 두 사람의 왕이 있었고 그 밑에 평의회와 민회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5명의 감독관이 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입법자인 리쿠르고스가 만들어서 정했다는 법률에 따라서 시민들을 교육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파르타 교육으로서 국가는 시민의 행동 교육 결혼 등에 관해서 일일이 간섭하여 국가에 절대 복종하게 했습니다 시민은 누구나 어떤 어려움도 반드시 이겨 내는 엄격한 규율 생활을 하였습니다 허약하거나 장애아로 태어난 아이들을 동굴 속이나 산 속 깊숙한 곳에 내다 버렸으며 건강한 아이들은 7세가 되면 부모 곁을 떠나서 공동 교육 장소로 옮겨져 엄격하게 신체 단련과 애국정신을 교육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글과 음악도 배우지만 그보다는 정신 교육과 체육 그리고 갖가지 무예를 닦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견디어 내는 힘을 길렀고 오랫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참을 수 있는 체력을 길렀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언제라도 기꺼이 목숨을 버릴수 있는 정신도 머릿속에 박히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어릴 떄 부터 이렇듯 철저한 교육을 시켰고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식탁에서 음식을 훔쳐먹는 교육도 시켰습니다 이떄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훔쳐먹어야 하며 들키더라도 절대로 훔쳐먹었다고 자백해서는 안됩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소년뿐만 아니라 소녀들에게도 격렬한 육체 운동과 정신 교육을 시킴으로써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스파르타 국민은 30세까지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군대 생활을 하였고 30세가 지나면 비로소 관리 장교가 될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도 적게 먹고 옷도 검소하게 입었으며 무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또한 국가의 명령이 없이는 마음대로 시외로 나갈 수가 없었는데 만일 이것을 어기면 탈주자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모험심이 몹시 강한 페르시아인들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누리면서 페르시아라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키루스가 다스릴 때에는 바빌론과 리디아의 문명이 페르시아의 다스림을 받았으며 페니키아의 도시와 소아시아에 있는 스리스의 도시들도 그들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인 다리우스 1세는 더욱 드넓은 세계를 다스렸고 그의 군대는 다다넬즈 해협에서 인더스 강까지 나아갔습니다 또한 그의 세력은 이집트 북부와 중앙 아시아까지 미쳤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스키티아인의 본거지인 러시아의 남부에 다다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보스포러스 해협과 다뉴브 강을 건너서 북부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말을 탄 스키타이군에 밀려 쫓겨오고 말았는데 이떄 다리우스 1세는 군대를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 남겨 두고 자신은 수사로 돌아왔습니다 스키티아에서의 다리우스 1세는 실패는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시민과 도시드르이 반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또 그리스 본토인들도 여기에 힘을 합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인들을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페니키아 함대를 동원하여 에게 해의 여러 섬들을 차례로 무찌른후 기원전 490년에 그리스를 공격했으나 마라톤의 싸움에서 패하였습니다 오리엔트는 기원전 6세기 후반 무렵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통일 되었고 기원전 522년에 즉위한 다리우스가 대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떄 소아시아 해안 지방에는 그리스인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각각 자유로운 도시를 세워서 살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세력은 서쪽까지 미쳐서 그리스의 도시들도 그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그들의 무역 활동이 막히고 자유를 빼앗기자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 식민 도시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은 곧 원조를 요청하자 스파르타는 응하지 않고 그 대신 아테네가 군한 20척을 보내주었습니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가 반란에 원조했다는 구실로 자신의 사위인 마르도나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바다의 육지에서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여 트라키아 해안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으로 함대 300척이 부서지고 군사 1만명이 바다에 빠져 죽자 원정은 일단 중지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군사를 맞은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의견을 한데 모으지 못했는데 마라튼 평원에서 싸운다면 수가 많은 페르시아 군이 유리할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에 항복하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맞섰는데 정치가이자 장군인 테미스토클레스가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싸우는 쪽으로 결졍되었습니다 곧 아테네의 전 시민들이 총동원되었고 모든 군사들은 싸움터에 나갈 준비를 했으나 페르시아군은 2만 여명이나 되는데 아테네군은 1만여 명 밖에 안되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평원에서 싸우면 페르시아의 기병에서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통하는 골짜기에 진을 치고 며칠 동안 적을 살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가끔 적은 군사들을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건드렸는데 이에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군의 수가 많지 않다고 얕잡아 보고는 그대로 쳐들어왔습니다 아테네군은 밀티아데스의 명령에 따라 적은 군사로 정면에서 페르시아 군을 맞아 싸웠고 양쪽의 주공격 부대는 옆에서 적을 에워싸고 대담한 작전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난데없이 아테네의 대군에 에워싸야 쩔쩔매다가 6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으며 아테네군은 고작 192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때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전투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병사가 기진맥진하여 달려 오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병사는 승전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려 주려고 41,6킬로미터나 되는 걸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광장에 이른 병사는 "우리가 이겼다" 라는 한 마디를 시민들에게 전한 다음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장거루 경주인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으며 이떄 죽은 병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마라톤 경주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배를 타고 돌아가다가 수니온 곶을 돌아 다시 아테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물러가다가 아테네군의 철통같은 방어 태세를 보고 뱃머리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살라미스 만의 해안에서 해전을 지켜 본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함대가 무참하게 패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육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리스는 또 한 번 통쾌하게 페르시아를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페르 시아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니 페르시아 육군은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그리스의 동북부에 있는 뎃살리아 지방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계속 패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그리고 영토를 침략하라는 명령을 내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북동쪽 50킬로 미터는 지점인 플라타이아의 평원에 진을 쳤으며 그리스군도 이에 맞서 연합군을 조직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였고 총 병력은 3만여 명이었습니다 마침내 플라타이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그리스 군은 긴 창과 방패를 갖고 공격하는 중무장의 보병이 주로 맞서고 가벼운 무장의 보병들은 양쪽에서 지원을 했으며 페르시아군은 기병과 궁수들을 중심으로 하여 싸웠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그리스의 중무장한 보병들을 당해 내지 못한 페르시아군의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해안의 마칼레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물리침으로써 이오니와 지방의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두 3회에 걸쳐서 20여년 동안이나 그리스와 싸웠던 페르시아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계속 패배한 페르시아군이 언제 또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일이어서 그리스는 이제 겨우 페르시아 지배에서 벗어난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스파르타는 그리스 제1의 도시국가로 여겨졌습니다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수는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의 전투에서 쳐부순 뒤부터는 행동이 거만하고 성품이 포악해졌기 떄문에 이오니아의 마음을 샀습니다 그 결과 이오니아인들은 스파르타 대신 아테네에 연합 함대를 맡아 달라고 했으므로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가 에게 해 일대의 여러 도시국가를 끌어들여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동맹에 가입한 여러 도시국가들의 공납금이 에게해 중앙에 있는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전에 보관되었으며 동맹회의도 여기에서 열렸습니다 동맹에 가입한 도시국가는 함대와 군사들을 직접 제공하거나 거기에 맞먹는 비용을 냈는데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군사 대신에 군사비용을 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아테네의 해군력은 날로 강해졌습니다 이 무렵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쫓겨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모든 시민에게 중노동을 시켜서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게 햇으므로 중노동이 시달리는 시민들은 그가 페르시아와 전부터 내통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에 아테네의 민회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체포를 결의했고 추방 명령을 받은 그는 이곳저곳으로 몸을 피하다가 할 수 없이 페르시아로 망명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테미스토클레스를 후하게 대접해 주었으나 3번 뒤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여기 까지입니다 동까쓰 학원 여러분들 또만나요